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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 전투 홍범도 장군 스토리 입니다. 2019년 8월 개봉하는 영화 봉오동 전투 역사 영화로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영화 봉오동 전투 1920년 6월에 독립군이 일본군과 맞서 이긴 최초의 승리를 영화로 만든 것입니다.
당시 역사적인 배경 살펴보면, 1919년 3.1 운동 이후 만주 지역에서는 독립군의 무장 투쟁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봉오동 전투가 갖는 특별한 의미는 한국 독립군과 일본 정규군 사이에서 벌어진 최초의 대규모 전투였습니다.
봉오동 전투에서 독립군이 승리함으로 사기가 크게 높아졌고, 그 이후 청산리 전투 등에서도 일본군을 대파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공식적인 역사 기록에 따르면 봉오동 전투에서 사망한 일본군 전사자가 157명이라고 합니다.
홍범도 일지에는 일본군 310명이 전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반해 독립군 사망자는 4명에 불과했습니다. 봉오동 전투가 일어난 장소는 중국 지린성 봉오동 일대입니다.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대전자령 전투는 독립군의 3대 대첩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봉오동 전투 승리를 계기로 1920년 10월에는 청산리 대첩에서 항일 투쟁 사상 최대의 승전보를 기록하게 됩니다. 청산리 전투에서 독립군은 100여 명의 사상자가 나왔지만, 일본군은 무려 2천여 명이 전사했습니다.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에서 수많은 이름 모를 독립군들이 활약했지만, 봉오동, 청산리 전투의 영웅 중 한명은 홍범도 장군입니다. 홍범도 장군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독립 투사, 총알로 바늘귀도 뚫는 백발백중의 스나이퍼로 불렸습니다.
봉오동 전투 홍범도 장군 1868년 평양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 부모님을 여의고, 머슴살이를 했으며, 산짐승을 잡는 포수 노릇도 했습니다. 백두산 포수 출신 홍범도 장군은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운동과 이듬해 있었던 을미사변을 계기로 항일 운동에 뛰어들게 됩니다.
강원도에서 포수와 빈농 등을 규합해서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항일 의병장으로 활동하다가 1919년에 창설한 대한독립군 사령관이 됩니다. 주로 한반도 북부 지역과 만주를 근거로 무장 독립 투쟁을 했습니다.
1921년에 있었던 자유시 참변으로 독립군이 러시아 적군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그 이후 연해주에 머물면서 한인 사회의 중요한 구심점 역할을 했습니다. 1937년에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되었고, 홍범도 장군은 고려극장 수위, 노동자로 일하면서 노년을 보내게 됩니다. 낮에는 정미소 노동자로 일하며 말년을 보냈다. 안타깝게도 그토록 바랐던 독립을 보지 못하고 1943년에 75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1920년에 홍범도 장군이 이끈 독립군 연합 부대가 승리를 거둔 봉오동 전투 이번에 영화화되면서 다시 한번 홍범도 장군이 조명되고 있습니다. 이상, 봉오동 전투 홍범도 장군 스토리였습니다.